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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

  • 천진암 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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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
  1. 천진암 강학


천진암강학8-김학렬 若望 신부 강의(2017.11.04)
2017 천진암강학 VIII.
 
 
(2017. 11. 4. 16시 광암).
김학렬 약망 신부.
 
 
하느님의 종 權哲身, 權日身
 
+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자비로우신 섭리로, 구원의 은총을 기묘히 베푸시는 천주여,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로 하여금, 주의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든 이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 불철주야로 전파하다가 마침내 거룩하고 장렬한 죽음으로, 그 진리를 수호하며 증거하게 하셨으니, 선조들에게 시성의 영광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도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내려 주시어, 우리도 선조들을 본받아 신앙으로 살다가, 신앙을 위하여 용감히 죽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1980. 6. 24. 김남수 주교 인준).
 
사진 1-3./ 양평에서 권철신 가문이 살던 장소를 사진과 같이 확인하였다.
1. 권철신 묘지명/ 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 설명!
= 족보에 나오는 이름휘는 철신, 자는 기명,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 그 유명한 거처는 가로되 왈 감호라 한다. 집안은 안동 권씨다.(고전번역원의 오역!)
 
*.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것 네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7죄종을 극복하며 덕스러운 삶을 사는 칠극을 실천하는 집안이다.
 
=윤유일전 p. 31/ 감호수창첩에 권철신의 한시 11수가 전한다. 감호에 낙향한 증조 할아버지 흠은 함경도 관찰사였었다.
 
사진 4. 갈산
=과거(1784. 9/cf. 달레상 311=양근 갈산에서 선교!)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전파하기 시작(권철신 묘지명)
-1795년에, 주문모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석정동, 사축서동으로 피하였고, 경기도 양근의 권상문(권철신)의 집에서도 3일을 머물렀다. (추안,순조13.15 주문모공초; 달레 상 390= 양근 직승거삼일).
 
사진 5. 양근 한강포/ 1807 정묘보
-사학징의에서는,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에 살면서 과거공부를 한다고 하였다.
사진 6. 권철신의 형제들은 52녀였다.
=> 5
2. 천진암강학
 
. Maubant 신부가 183812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쓴 편지에,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etablissement)에 관하여, 이벽과 이승훈이 함께 노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진7 /역사 교과서,!
. 페낭신학교 교과서
우리나라의 3번째(정규하, 강도영, 강성삼) 신부님들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의
*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PULO-PINANG 1885
R. 그때에, 어떤 한국의 학자들이 고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철학 공부를 하였다 ; 그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들은 이덕조(Ni-Tek-Tso) 로서 별호가 벽이(Piek-i , 즉 고집이 센 한 사람 =obstinatus)라는 이와, 권철신(Kuen-Tsiel-Sin-i), 그리고 정(Tieng)씨네 두 형제들(정약전/Tieng-Jak-Tsien 과 정약용/ Tsieng-Jak-Iong)이었다. 그들은 인간 본성과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를 검토한 후, --- 꾸준히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적응)훈련하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1770)
 
사진 8./ 강학 당시의 문헌.
.권철신 묘지명/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을 담론(談論)하였는데,
 
@정약전과 정약용, 이승훈, 이존창(cf.다블뤼의 조선 주요순교자 약전 149), 윤유일?(cf. 추안 1801. 2.18曾居村中) 은 천진암강학에 참석하였다.
(순교자가 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약용은 생략하였을 것이다.)
=윤유일전 p.27/ 1790년에 裝送之時 -裝送之事(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공초) 하였다.
p.28/ 이존창이 177613세의 이총억을 따라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왔다.
 
= 정약전 묘지명에, 與李潤夏李承薰金源星等등과 돌같이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약전이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었다.
 
 
@잘 준비된 북당 세례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하여 보낸(백서, 꾸며서 보낸=裝送李承薰)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진 9./ 일신 열심 종벽!
3. 양근 감호 갈산에서 이벽의 강의<=이벽의 6개월 연구(10년이상 독서처와 + 4-9)
=과거(1784. 9/cf. 달레상 311=양근 갈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 1786.6.양력)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弟日身熱心從檗! (감호암 사진 + 보감 양근 갈산)
 
사진 10./ 세례식
=1784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 이승훈공초 + 달레상 307 + ?) +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8.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삼혼설+4근본원소... 그래서 (권철신)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 178412월 이전에(cf.안순암의 2편지)암브로시오로 세례받음/달레상311. + 1790. 10. 16.구베아 주교의 편지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사진 11./권철신의 믿음
4. 권철신의 신앙
=묘지명에, 그러나 공은 서교를 믿지 않고 우제의(虞祭義)1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혔다. / 이는 1791년 제사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도, 허례와 허식에 대한 반론의 글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안순암의 1782년 편지가 그 증거이다.
 
+안순암의 1782년 권기명에 답함에, ‘이러한 문제들은 기왕 의견이 서로 합치하지 않을 경우, 결국 갑을논박이 되어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기 마련이니, 이후로는 서신 왕래에 피차 안부나 살피고 정담이나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하네.’
 
= 안순암의 갑진178410? 1편지, 권기명에 답함
덕조(德操)가 얼마간의 서책을 가지고 갔다는데(=9월에 감호를 찾아 선교/ 일신 열심종벽!) 이곳을 지나면서도 나를 찾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 그 까닭을 알 수 없군. 아마 공부의 길이 달라 서로 얘기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남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천주의 뜻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 것일세.
 
=김시준 벽위편 p. 97. = 안순암의 을사일기/ 내가 권기명과 이사흥에게 편지를 준 것이 갑진178412월이었는데, 을사17853월에 천학의 옥사가 있었다.
* 안순암의 갑진178412/ 2편지, 권기명에 답함 /cf. 벽위편, 안순암의 을사일기(뒤에)
//그런데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1.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12?) -서양선비의 학문에 이가환(=대토론과 승복 이후임?), 정약전, 이승훈, 이덕조가 서로 결속하여 신학의 학설을 열심히 익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 문의에서 온 (이기양 어머니의)언문편지 가운데, 이기양의 두 소년(총억+방억)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고. = 이기양 가문이 모두 신앙하였다는 증거!
2.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 80난 늙은이가 배울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을사1785109일에 양지 수령 유사형이 찾아와 말하기를, ‘문산()의 수령이 틀림없이 양근으로부터 찾아와 뵈올 것입니다.’ 다음날 --, 나와 그의 나이가 훨씬 차이나고, 수십년 동안 스승의 예의로 나를 대하여 오다가 하루 아침에 이와 같으니, 이것이 천학의 예법인가?
 
순암선생문집 제8, () , 이사흥에게 답하다. 을사년 1785
나와 절친한 사람이(=이벽? 권일신?) 천주학(天主學)을 하고 있는데, 그 학설은 우리 유가(儒家)와 다르기 때문에 선입관(先入觀)이 마음 속에 자리잡아 이상한 것이나 찾고 괴상한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대략 나의 견해로 그대(사흥)와 녹암(鹿菴)에게 질문하였으나 끝내 한 자의 답장도 받아 보지 못하였으니, 틀림없이 그대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사진 12./ 명례방과 을사1785년 박해
5. 을사1785년 박해(이벽의 순교와 권일신의 용맹)
서울과 광주 지역의 학자들이 이벽의 전교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시작하자, 양반가문에서는 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17853월경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이 정약용 형제들과 권일신 부자와 이승훈 등을 앞에 앉히고 교회예절을 거행하며 교리 강좌를 하다가 추조들에게 적발되었는데,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 96 , 79; 정약전 묘지명; 징의 378) 권일신은 이 집회에 아들 권상문,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김범우 등 중인 수십 명이 함께 참석하였다가, 형조의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중인 출신 김범우만 투옥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자, 권일신은 아들 권상문과 이윤하(매부). 이총억. 정섭! 등을 데리고 형조판서에게 나아가, 성상을 돌려줌과 동시에 김범우와 함께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적은 형조의 뜰에서 불사르고, 전국에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曉諭文)이 전달되었다.(최석우, 815;벽위편 2, 을사추조적발 ; 정조실록 151791 118; 징의 378)
이 사건으로 김범우는 많은 매를 맞고 단장(단양설과 단장설!)으로 귀양 가서 다음해 가을 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이승훈의 1789 서한; 징의 82; 달레 상 318),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유배를 가기를 원하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최석우,815= 벽위편 2, 차대연설 신해1791 1025).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에게 박해가 가해져, 양반 지도층 신자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등이 가정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집안의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은폐하기 위해 두 가지 뜻을 가진 언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달레 상 320), 이는 형식적인 무마용으로서 당시 많은 신자들 특히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취하던 방식이었다(옹위 49)
 
* 1785을사박해 - 이벽 성조의 순교 + 집안들의 문중박해(이승훈, 정약용/권철신은 父亡!)
박해가 4/5곳에서 일어나 체포 +감옥 = 10명 넘게 피를 흘리며 증거(이승훈의 1789년 편지!)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는, 승훈이 1784말에 그라몽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밀사는 17854(음력?)에 돌아왔으나 이미 박해가 시작되어 그라몽 신부의 답장과 책들을 빼앗겼다. (=4103).
* 백서 45-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우들의 비방에도 끝까지 참고 성교를 봉행/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사진 13-14. /권일신과 모방성직제도
 
6. 모방성직제도와 권철신의 활동
1786년 모방성직 제도/ 이승훈의 1789년 편지 + 달레 상, p. 322-
용문사 대웅전 앞의 안내판 글에서, 권일신의 14대 할아버지요 개국공신 권근이 용문사에 모셔진 큰 스님 정지국사의 부도비문을 작성하여 모셨다는 내용을 확인하면서, 권일신 성현이 평상시에도 양근 감호 뒷산의 용문사를 자주 찾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정신을 수양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양촌집 38, 정지국사 부도비 참조)
 
을사년1785 박해로, 이벽을 중심으로 명례방 집회가 열리던 중, 추조금리들에게 적발되어 성물을 다 빼앗기고, 집주인이던 김범우는 매를 맞고 귀양을(밀양 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이벽 성조와 이승훈, 정약용 집안에서는 문중박해가 일어나, 이벽성조는 순교하시고, 이승훈도 정약용도 드러나게 신앙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권철신.권일신 성현의 아버지는(맹용) 경자년1780에 이미 작고하셨으므로, 권일신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을사박해로 교회가 움츠려든 상황에서, 권일신 성현은 성령의 힘을 얻어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피정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786년 봄 경, 옆 마을 도주울(도곡리)의 같은 년배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와 함께 용문산을 찾아 8일 동안 피정을 하게 되었다. 이 피정의 결실로 평신도들이 스스로 모방성직제도를 세워, 이승훈도, 정약용과 정약전도 모두 신부가 되었고, 권일신은 주교로 활동하게 되었다.(달레 상, 322-, 천진암성지> 역사자료실 >착한 목자 권일신 ) / 권맹용 1780死亡으로 주도적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7. 전국적인 천주교 전파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시작이 이벽과 권철신의 제자들이 모인 천진암 강학에서 출발하였듯이, 신앙의 전파도 그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전교를 받아서 천주교를 믿게 된 이들은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로서 권철신의 학문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양근/권철신의 제자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양근 의 감호는 자연히 천주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권일신이 그 주축이 되었다. 권일신은 가족과 하인은 물론이고 친구와 친지 등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여 입교시켰다.[권일신의 전교로 입교한 집안사람들로는 아들 권상문, 권상학, 권상벽,/ 권상문의 아내 오숙혜, 이윤하의 아내가 된 누이 권씨와, 조숙의 아내가 된 딸 권데레사, 조카 권상술과 권상립, 권상익, 비 순덕과 구애 등이다(서종태, 양평군지 상, 493 각주)]
망설이던 그의 형 권철신도 그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고, 인근에 거주하는 윤유일과 조동섬 등도 입교하였다. 권철신은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달레 440/그 이름의 권위로 많은 외교인이 복음으로 끌려왔다. 489/여주의 노론 대가인 김건순18세에 양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에게 문의하고(cf. 안정복의 1782년 편지와 우제의(=묘지명)를 지음 ) 송조 때의 의식으로 장례를 치루고 긴 변호문을 썼는데, 이가환도 이에 감탄하였다.(백서 56) ; 491 김건순은 밤에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1797. 8월에 정광수가 전달한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여, 올바른 구원의 길로 나가 여주의 이중배 원경도 이희영 등을 개종시켰다. 사학징의에, 김건순은 국청정법죄인으로 처형되었다.(백서 60)
 
* 강완숙의 진술(사학징의)에서, 제가(=주문모신부)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 등의 집입니다. 편지도 압수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 윤유일이 가져온 (주문모의 미사 제기 등?)기물은 정약용의 집에 보관(cf. 1801. 2. 18. 이승훈 공초중)
 
* 정광수(사학징의)의 진술에서, 1791년에 권일신한테 배웠고, 1799년에 벽동에 최해두와 조이수의 세집을 담을 터 첨례장소(精舍)로 꾸며, 홍문갑(강완숙)의 집에 머물던 주 신부를 모심 + 편지를 여주의 김건순에게 전하고 답장을 받아옴, 정광수의 일기가 있다.
권일신의 전교로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주의 유항검이 입교하여 지방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서울에서는 진산의 진사 윤지충과 홍낙민, 최창현, 지황 등 10여명이 입교하였다.(옹위48).(서종태 493).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서울에 공동체가 설립되면서 거의 동시에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도 공동체가 생겨났다.
 
* 북경을 왕래하는 최초의 교회 밀사로 윤유일(바오로)이 선정되는데, 그가 거주하던 한강개 ( 씨앗 21참조 -1760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나, 양근 한강개 마을(강상면 대석리)로 이사하였다) 역시 광주지역과 물길로 연결되는 곳이어서 이웃 마을(감호)의 권철신에게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 충주지방의 천주교 전파도 권철신의 인척관계로 시작된다. (서종태, 497) 권철신의 조카인 권상익(권득신의 )을 사위로 맞은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이기연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아들 이중덕, 며느리 권아기련, 조카 이종덕, 종질 이문덕, 종손 이관기 등과 집안의 비녀까지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 권철신의 사위인 이재섭(남보498=연안 이용섭, 안정복과 교류한 이인섭의 4?) 충주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권철신의 처남인 남필용도 충주에 살면서 1791년에 입교하였으며, 남필용의 아들 남제도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사학징의 62, 169-170, 178, 182-4, 274-275, 282-6)
 
* 내포지방 여사울의 이존창은 원래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권철신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던 중 1784년 겨울 무렵에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발길은 당진과 보령의 염전지역에서 삽교천 인근의 덕산, 그리고 공주와 청양으로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과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그의 가르침으로 신자가 되었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지도층이 된 홍필주와 황심도 역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 전라도 지방의 경우도 전주와 진산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양근의 권철신의 집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주의 유항검은 1784년에 권철신을 찾아갔다가, 권일신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달레 상 314;징의 228) 진산의 윤지충도 권철신의 제자인 정약전의 영향으로(=이종 4) 1784년에 입교하여,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영세하였다. 이어서 윤지충의 영향으로 무안. 무장, 고산 지역의 신앙공동체도 생겨나게 되었다.(달레 상 531)
 
이상과 같이 양근에 사는 권철신 . 일신 형제가 이벽의 전교로 신앙을 가지게 되자, 이어서 충청도의 내포지역과 충추지역,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와 진산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조 191795에는 금정, 예산, 충주 등 호서지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았으므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보내어 천주교를 탄압하고자 할 정도였다.(달레 상 396 ; 정조 19725)
 
 
사진 15./ 제사금지와 1791 신해년 박해.
 
8. 제사금지와 신해 박해
=윤유일의 1789년 북경행 / 윤유일전 p. 69 = 윤유일이 은자 20냥에 私持馬란 명목으로 一窠를 사서, 이가환이 은자 500냥을 내놓았고(징의 p. 232),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cf.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에는 112일출발 -1227일 북경도착 = 3,111),
 
= 왕조실록 1791113(갑술) ,15-11-03[02]평택 현감 이승훈과 양근 사람 권일신을 잡아다 문초하다/ 일신의 아들 세(상학,,) 사람은 바로 정복의 외손자인데, 30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모두 그 외조부의 장례에 가보지도 않았으니, 그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 (cf. 1791. 안정복 년보에 80세로 7월 계사일 오시(午時)에 침실에서 돌아가시다. = 제사문제로서 병을 핑계 삼아 제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 + 윤지충(1759-1791 바오로, 1783 진사)5월에 모친상을 당하고, 전염병을 핑계로 삼아 8월 그믐날에야 기한을 넘겨 장사를 지냈다. 정조 1791. 10. 20에 대사간 신기를 시작으로 상소가 잇따르자, 10. 26에 관아에 자수하여, 117일부터 취조가 시작되었고, 1113일에 참형으로 순교하였다.(cf. 시복자료집 1)
 
16/ 순교자들의 양심선언
 
= 권일신의 순교 열망과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연중 10주간 화요일), ‘형제들이여, 내가 이생명을 얻는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내 하느님의 수난을 본받는 자가 될 수있도록 해주십시오. --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했을 때는 나를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쓰는 말을 믿으십시오. --내가 수난을 당한다면 여러분이 나에게 호의를 모인 것이고, 수난에서 제외된다면 여러분이 나를 미워한 것입니다.’
 
=벽위편, 신해진산의 변, 19. 장악원 사계(김시준역 P. 144=448) + 정조실록 1791. 11.5.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 초 사흘에(1791. 11. 3.) 비변사에서 계를 올리기를, --권일신이 서학에 빠진 것은 곧 친지들이 모두 들어 아는 바입니다. 일찍이 을사1785년에 중인 김범우를 핵실할 때, 형조 법정에 들어가서 김가와 같이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였으니, -- 교주라 하는 것--- .
권일신은 양근에 살고 있으니, 만일 잡아오려면 시일이 많이 걸리겠으므로 아직 핵실하지 못하였더니, 일신이 제발로 형조에 들어와(앞서 1791. 11. 1일의 사실을 알고 2일에 자수?) 함께 벌을 받겠다 함은 뚜렷한 증거로서 그 요학의 괴수가 된것을 알겠거늘, 하물며 여러 사람이 진술한 것이 한 입에서 나온 것같으니, ---권일신을 형조로 하여금 핵실하게 하여 법률을 바로 잡음이 어떠하오리까?, 전교하시기를 , 그렇게 하여라 하였다.
= 벽위편 p. 69/權日身居在楊根 若發關推捉則 多費日子(이만채본=) 姑不得究覈而 大抵日身之自入秋曹 願被同罪者 大是的贓明驗 其爲妖學之窩主’ = 정조실록 1791. 11. 5. 말미에도 이 내용이 들어 있으나, 앞부분의 權日身居在楊根 若發關推捉則 多費日子(이만채본=) 姑不得究覈而 이 생략되어 있다. 정조실록 1791. 11. 8, ‘세번째 공술에서, 시골에서 올라올 때(112일에 윤지충 문제를 인지하고 자수하러 올 때?) 동생이(=권익신?) 중도에 마중나와서 대략 홍낙안(=홍낙민 순교자의 친척이어서 이름을 홍희운으로 바꿈 =2차 공술에서 8촌 족조 권부의 외손)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 고 하였다.
 
=정헌묘지명/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상은 번옹에게 명하여 관서(官署)에 가서 목만중홍희운(=홍낙안)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호남옥사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악원(掌樂院) 조사 사건이다.
 
=박광용, <창설주역 2>, 123- / 3차심문에서, 외조부의 회장에 자식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사경을 헤메는 중병 때문이라고 핑계. @ =이벽의 순교 때 문중의 핑계와 같은 것으로, 이는 사실상 장인의 제사를 거부하기 위하여 권일신 본인과 3명의 아들들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7차 심문때도 진술을 계속 번복했던 때문에, 30도의 한계까지 치면서 심문할 때까지, 예수를 사망하다고 배척하지 않았고, 사학이라는 2자를 늦게 인정함. /이후 소위 회오문이라는 것은 사실상 정답을 불러주는 대로 쓴 듯한 내용으로, 아주 체계적으로 작성된 글로서, 혹형을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이 썼다고 보기에는, 아주 잘 짜인 글로서, 채제공이나 홍인호 등 측근 누구가 써준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 고문을 받고 나서 정신이 혼미한 신태보는 야소도 모른다고 하였다(달레 중 134).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의 1791. 11.16.의 내용은, ‘죄인 권일신이 소지를 올려, 耶蘇學(=원문에서도 耶蘇)이 요사하고 부정하다는 것으로 공초를 바쳤으니하였으나, --- ‘지금은 비록 넋이 나가 두려움에 떨면서, 날마다 선으로 나아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지만, 전에 잘못에 빠진 죄는 결코 쉽게 용서하여 풀어주기 어렵다.’ 하고 있다. 30대의 곤장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로 헛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내용이라 할 것이다.
 
=이기경 벽위편, p. 109- 형조 계목 양근죄인권일신 --6초 일차형문 -- 7大抵其學異於孔孟之學 乘人五倫至廢祭祀 --卽邪學遲晩納招 --耶蘇二字終不斥言邪妄 --始以邪學二字遲晩 -- /신해1116일 형조계 --聖意八耄老母奄奄呼絶 --口招--耶蘇之學妖邪不正納招(cf. 달레 상 359; 김시준역 벽위편 p. 170).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45(+133위 시복자료집 141쪽 각주의 공맹지학요탄부정에 대한 설명 참조) + 보감, 대한성교사기 / = ‘같이 있던 사람 하나가 그를 대신하여 어떤 굴복의 표시를 했다’. = 大抵其學異()孔孟之學妖邪不正에 대한 해석!!!
 
이에 앞서 이승훈의 배교시.문이라 일컫는 내용도, = 아버지의 焚書에 대한 벽이시와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 배교시가 아니다.) +벽이문(이기경은 1791.11.13.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 불교와 같다는 것을 배척하는 것뿐으로, 오히려 천주교의 깃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僞天主云云者 只斥其非天學 --爲眞天學立幟而不見其闢之也 = 이기경 벽위편, p.146; 김시준역 벽위편, 156) + (주재용, 가톨릭사의 옹위, p. 100)
=옹위 59/ 을사박해 - 소위 벽이문. 시를 지었나? = 달레의 기록 / 아비 동욱은 아들이 배교했다고 전하고 승훈에게 척사문을 짓도록 하였다. <= 거짓말임은 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기 전 아버지의 승낙을 받았기 때문이다.
*= 승훈의 양심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 자신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모방성직제도의 죄만 언급/ 4, 93)
 
17/ 권철신의 선교와 순교 (다블뤼의 비망기와 달레 상 440 = 훌륭한 순교자)
 
광주시사/ 권일신이 조상제사 문제로, 예산으로 유배중 뒤따른 자객에 의하여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자, 이후 권철신은 문을 닫아걸고 산문을 나서지 않은 채 조용히 10여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웃 마을에 살던 조동섬은 천주교 서적을 본 죄로 양근 관아의 감옥에 갇혀 아홉 달 동안 형벌과 신문을 받은 뒤에 풀려났다. 이같이 신해박해로 권일신을 잃고 침체에 빠졌던 양근 지역의 공동체는 그의 제자인 윤유일을 중심으로 꾸준한 활동을 편 결과 성직자 영입이란 결실을 맺고,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서종태 502)
 
*을묘 1795 박해
주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고(1795627), 대신 고생을 무릅쓰며 보필하던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이 신부를 대신하여 1795628일에 재판도 없이 포도대장에 의하여(정헌 이가환 묘지명) 매맞아(장폐) 순교하였다(집중본, 2125). 그들은 결코 주문모 신부의 행적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비밀리에 강물에 던져졌다.(시복시성위원회, 48) 이 사실로 인하여 승훈, 가환, 약용 등은 예산, 충주, 홍주(금정) 지방으로 외직을 맡아 낙향하게 되었다.(옹위 70)
주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석정동, 사축서동으로 피하였고, 경기도 양근의 권상문(권철신)의 집에서는 3일을 머물렀다.(추안,순조11801. 3.15 주문모공초). 이후 충청도 연산의 교우집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17965월에 창동에 있는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강완숙은 서울의 벽동에서 이웃하여 사는 조섭, 최해두 등과 세 집이 담을 허물고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였다. 서울에는 六會라 하여 황사영, 현계흠, 홍문갑, 김여행, 홍익만, 김이우(?)의 집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다. 초대 회장은 정약종이 맡았다.(믿음의 씨앗, 33)
 
강완숙의 진술(사학징의)에서, 제가(=주문모신부)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약용(1801추안, 서찰중정약망위수호!),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 등의 집입니다. 편지도 압수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18/ 권철신의 순교와 가문의 활동
9. 경신(1800) 박해와 신유박해(백서 11-13, 순조실록 1801. 2.18., 추안1801. 2. 11-21.)
 
제사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798, 1799년에 왕의 밀사로서 신자행세를 한 조화진의 간계로 충청도 해미진영에서는 내포지방의 교우 100명 이상이 순교하였다.(벽위편, 달레 상 397/12 = 옹위 71; 백서해제 34-9, 36-13 ).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양근에서는 권철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하였다. 반대파 홍낙안 등에 의하여, 벌써부터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폐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이기경, 벽위편, p17), 홍낙안은 1791. 9. 29에 좌의정 채제공에게 <권철신은 부모의 신주를 땅에 묻고 , 이윤하는 그 아버지와 조부의 제사를 폐한자> 라고 고발하였다.(벽위편, 30) 이어서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 성토하고 권일신을 교주로 고발하였었다. (벽위편, 42)
 
양근에 사는 권철신의 집안은 본래 이름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해갔다. 기미년(1799) 여름 그의 고향에서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고, 이에 권씨 자제들도 맞서 대항하였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18005월에 양근 지방에서는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백서 11-13) 이 때 양근에서는 신주 도난사건(=권철신 묘지명)이 있었는데, 경신년 국상(1800. 11)후 양근 악당 김모 등이 도둑을 보내 집안의 4대 신주를 훔치려 하다가 찾아내지 못하자 <권철신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고 소문을 내었다. 신유년 봄에 군수 유한기가 조사하여 벽장 속에 4대 신주가 봉안되어 있음을 확인하고도 느슨하게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새 군수 정수성이 와서 연루자 50여명이 죽거나 유배당하였으나, 권철신 가문의 신주를 훔치려 한 죄는 불문에 붙였다. 늙고 겁이 많은 권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고,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 권상문을 대신 잡아들였다. (백서 13행 참조)./ 권일신의 1792년 순교에도 가담하였을 이들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1801년 신유박해 때에 권철신을 감옥에서 장살(백서 51=1801. 2. 22에 매를 맞고 죽었다. 그의 시신은 이가환과 함께 기시되었다.)하였고, 아들 권상문을 비롯하여 양근과 여주 지역의 순교자들을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기를,
그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찾아낸다면 권일신이 바로 우두머리입니다. 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도 그들이 허물을 고치기는커녕 여전히 기고만장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권철신의 온 집안이 악()을 계속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하였다.
 
=이기경, 벽위편 2, 신유박해 p. 247 -
19/ 부신계 -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잡아들이라고 함 = 不動終不悛改承薰
210/ 대왕대비 殿傳曰 推鞫 - 죄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原情(사정을 하소연!)
211/ 국청죄인 이가환 형문 13, 이승훈 30, 정약용 30, 최창현 30, 권철신 5(=나이에 준한 매질!), 최필공 원정.
213/ 三司合啓 - 정약종 윤패상지죄 +원정후 형문 13, 임대인 조동섬 홍낙민 원정.
214/ 이승훈과 최창현 面質. 김백순 원정// 신봉조 상소 p.263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니, 승훈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려있고, 魔祟마수로써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刑具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죽자하고 실토치 않으니 如草芥就刑戮如樂地 -- 抵死而不吐!’. @1795년에 윤유일 등이 緘口無一言 한 것과 같다.
-- 15/ 승훈 갱추후 10, 김백순 24, 이가환 홍교만 정약전 오석충 홍獻榮 원정.
p.270 16/ 李學逵 원정,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更招, 김백순 4, 홍교만 20.
p.272 17/ 정약종 16, 이존창 原情.
p. 275 / 16일에 지사 권엄 등 연명 上疏.
p.283 17/ 이가환 갱초 12, 이존창 30, 최창현 6, 오석충 30.
p.285 18/ 이가환 30, 오석충 20, 이승훈 15, 권철신 갱초.
p.285 19/ 권철신 30, 오석충 30도 후 이가환과 면질.
p.289 20/ 조동섬 임대인 홍교만 정약전 홍낙민 갱초, 오석충 2, 김백순 이기양 原情.
--- 21/ 권철신 이존창 이기양 최창현 更招. / 이익운 上疏
==== 25/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35도를 맞은 후, 마침 고문의 상처로 인해 공이 죽자 드디어 기시(棄市)하였으니, 그날이 225일이었다.(현장에 동참한 정약용의 권철신 묘지명!)
p. 308 26/ 이기양 更招.
--- 27/ 이가환 遲晩物故, 권철신 物故(추안은 22). 최필공 부대시참 西小門外.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 結案正法. / 이존창은 공주목에 압송 정법.
조동섬 30, 홍낙민 30도 결안정법, 김백순 30, 이기양 오석충 갱초.
p. 309 - 결안 죄인 필공
p. 310. 26일 죄인 창현 --지만/ 죄인 승훈 운운 --矣身친수영세 --부동유일 --결연약종 --외칭혁면 내실心妖黨醜類 -- 矣身爲敎主爲代父 --왕법지엄요서요언전용 혹리?적실遲晩./ 죄인 낙민 운운의신 --신해후척절 --여필공 --창현 -- 여호요서요언전용 혹리?적실遲晩./ 죄인 교만/ 죄인약종 -- 범상부도 지만참약종 적몰가산등사 금해조봉승전거행사 (문서중양지일기유왈 국유대구군야 가유대구부야 십이자 윤지충? -- 부대시지율--)
 
사학징의 p. 171 = 국청정법 및 사사죄인장폐죄인 명단!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추국내용 =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로서 무효에 해당되며, 끝까지 지인들을 보호하였다. /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실천!
=이들은 마태오 리치 이마두의 적응주의 제사관을 가짐 = 언젠가는 변화될 규정에 불과한 조상제사 금령으로 이해하였다.!
 
 
19/ 감호암
=달레중 17 / 교회재건에 활발히 참여한 사람은 이여진 요한, 사촌 신태보 베드로,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재영?), 정약용 요한(배교했으나,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속죄하기에 힘썼다.) / p.19 = 1811년에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조동섬 유스티노와 면천의 한 토마스 + 교황께 보내는 편지를 작성한 사람은 권철신의 조카인 권기인(상립1768-) 요한과 권노방(상술 1762?-)으로서, 둘째 권제신의 아들들이다.
- 그러므로 정하상 성인이 전면에 나서기까지 그 중간 시대에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들은 권제신의 아들 권기인과 권노방이었다.
 
윤유일전 p. 32/ 권상문의 아들 권황과 권경. 권황(의원으로 생계) 기해박해때 우포청으로 압송= cf. 우포청등록, 기해 1221일 양근 수초.
 
 
고종실록1868, 05-04-06[15] 죄인 이재의 등의 결안을 받들었다
죄인 이재의이신규권복의 결안(結案)을 받들었다.
권복 형제는 바로 신유년 장형(杖刑)으로 죽은 죄인 철신(哲身)의 손자입니다. 스스로 이단의 교리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만들어 온 세상을 속이고 어지럽게 하였고, --종삼(鍾三)과 같은 흉악한 자와 기꺼이 결탁하였고, 철증(喆增)과 같은 역적과 버젓이 교통하였으니, 그 불측한 정절(情節)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이신규(李身逵,이승훈의3) 부자와 숙질(=이재의) 및 권복(權複權襫) 형제를 모두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게 해서 속히 전형을 바르게 하여 난의 뿌리를 끊고 세상의 가르침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40
 
20-23 /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는 정하상 성인의 친척들로 구성됨!
 
+주님, 저희가 창립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 있는 힘을 다하여 희생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부록
 
김건순
 
[간략정보]
한자 金建淳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인물
출신지 서울
성별 남
생년 1776(영조 52)
몰년 1801(순조 1)
본관 안동
관련사건 강이천 사건|신유박해(신유사옥)
저서(작품) 천당지옥론|성교전서
집필자 원재연
 
[정의]
 
1776(영조 52, 정조1)~1801(순조 1). 경기도 여주 지역의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 지도자.
 
[개설]
 
세례명은 요사팟[若撒法]이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으로 김이구(金履九)의 아들이다. 서울의 노론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여주의 종갓집에 입양되었으나, 1801(순조 1)에 신유박해로 순교하자 파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영특한 재질로 9세 때 논어를 배우면서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하여 훈장을 당혹케 하였다. 14세 때 집안에 있던 기인십편(畸人十篇), 교요서론(敎要序論)등의 천주교 서적을 읽고 천당지옥론(天堂地獄論)을 저술하였으며, 유학은 물론이고 불교, 도교, 병가의 서적까지 섭렵하였다. 18세 때 양부가 죽자,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喪禮)가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여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을 지어 반박했는데 당시 남인의 학자인 이가환(李家煥)이 감탄할 정도였다.
 
김건순은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독실하고 공손하여 그 덕망이 경기도 여주 일대에 널리 드러났다. 본래 넉넉한 집안이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어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보기를 청하러 몰려들었다.
 
한때 소북의 강이천(姜彛天) 등이 제창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에 휘말려 반역죄로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정조가 그를 무죄로 석방했다. 양근의 남인 학자였던 권철신(權哲身)을 찾아가 천주교를 배운 김건순은 1797(정조 21) 음력 6월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심한 대여섯 사람과 함께 바다로 나가 중국 남쪽 강절(江浙) 지방을 거쳐 북경에 가서 서양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도를 학습하여 본국에 전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사지식과 군함 제조술을 배워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다는 포부를 드러냈으나, 주문모 신부가 이를 질책하였다.
 
그는 영세 후에 신앙심이 더욱 커졌고, 절친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이희영[루가] 등에게 천주교의 신앙을 전교하였다. 이후 이들의 가족까지도 신자가 됨으로써 경기도 여주 지역의 천주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61(음력 420)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관가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천주교의 모든 교리를 체계적으로 종합 서술하고자 하였으나 초고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체포됨으로써 미완에 그쳤다. 처형을 당할 때에는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헛된 것이나 오직 천주교의 진리만은 지극히 참되고 진실한 것이므로 천주교를 위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다.’며 군중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권면하였다.
 
[참고문헌]
 
백서(황사영)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주,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한국천주교회사(샤를르 달레 원저, 최석우·안응렬 역주,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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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교회사연구소 자료중 =[대전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이국승(李國昇) 베드로 ? 保祿 ?
 
성은 이씨요 충주인 이다. 세례명은 보록(保祿,바오로)인데 포청(捕廳)에서 이송되어 왔다. 신유(1801) 522일 해당 읍에 내려 보내 정법(正法).
포청초 : 저는 경술년(1790)에 사서(邪書)를 최인길(崔仁吉)에게서 빌려보고 정사년(1797) 이래로 최창현(崔昌顯), 현계흠(玄啓欽), 윤종백(尹鍾百), 홍재영(洪滓榮), 정약종(丁若鍾), 손인원(孫仁元), 최인철(崔仁喆), 남송노(南松老), 이합규(李鴿圭) 등과 황사영의 하인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가(李哥)와 봉사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을묘년(1795)에 사학으로 인해 충주 관청에서 체포되어 무거운 형을 받고 승관(承款)하고서 석방되었는데, 신부라는 사람을 만나 그 말을 들으니 자못 심상치가 않았으므로 이에 사서(邪書)를 강론하고 사호(邪號) 보록(保祿)2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최사홍(崔士弘)의 집에 가서 교회 안의 동채를 살피니 사홍이 말하기를 기찰 포교가 사방에 파견되었다 하기에 저는 주막에 갔다가 변가(邊哥) 성을 가진 자의 집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른바 천주교인으로는 다만 호중(湖中)의 이연근(李延根)과 광주(廣州) 김명직(金明直) 밖에 모르는데, 연근은 사호가 단원(團園)이고 명직은 사호가 없습니다.
형추문목(刑推問目) : 너는 본디 향곡사람으로 사학에 침혹되어서 일찍이 을묘 년에 충주 본관에 체포되어 여러 번 악형을 당하고, 귀정(歸正)한다고 승관하여 석방되었는데, 옛날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마음을 끊지 못하여 겨우 옥문을 나가자 또 다시 최창현, 정약종과 상종하였다. 서로 왕래하며 결탁하여 사설(邪說)을 강독한 죄상은 이미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 그리고 황사영의 집에서 여러 해 머물렀는데, 여러 많은 사학인 중에서 황사영에게 간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는가? 주한(周漢 : 주문모 신부)을 집으로 초치(招致)하여 강론한 이외에 또 사호로 보록(保祿) 2자를 받고 사방으로 주류하였다.
지금 비록 체포되어 여러 번 포청의 악형을 받고 또 본조(本曹 : 형조)의 옥중으로 이감되어 몸에 수갑을 차고 도거(刀鋸) 앞에 있는 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입으로 사서(邪書)를 외며 죽음에 달려가기를 놀란 자와 같이 하니 어찌 침혹되어 빠진 것이 일찍이 금수도 이 같지 않을 것이다. 그 사정을 생각하니 더욱 더 흉악하다. 지금 엄히 심문하는 아래에서 감히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승관초(承款招) : 제가 사서를 최인길 에게 서 빌려 보고 황사영의 집을 왕래 하면서 약종, 창현, 필공, 필제 등과 서로 강론하여 10년 동안이나 이에 미혹되어 고질병이 되었으니 지금 죽음의 형벌을 당한다 하여도 끝내 고치기 어렵습니다. 본읍에 체포되었을 적에 악형을 이기지 못하여 비록 귀정(歸正)의 뜻을 아뢰고 하여 석방되었으니 이는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황사영의 집에서 누차 맞아다가 송경(誦經) 첨례하고 호를 보록이라고 받았습니다. 사학에서는 신주를 묻고 제사를 폐하는 것이 제일의 훈계이기 때문에 저는 과연 부모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결안초(結案招) : 저는 사학에 빠져 을묘 년에 충주 관청에 체포되었지만 감화되었다 하고 석방되었습니다. 그 후 옛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밤낮으로 빠져 주문모 신부를 숭봉하고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생각할 때 죄를 범한 것이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운운.
 
이국승 베드로는 성겸이라고도 하는데, 충청도 음성(陰城) 고을 출신으로 충주 고을로 이사하였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철저히 배우기 위하여 양근(楊根)의 권 씨 형제들에게 가서,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의 외교인 선생이, 있는 구변을 다 써서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이국승)베드로는 그의 모든 궤변을 쉽게 반박하였다.
처음에 1795년에 잡혀 배교의 말을 하여 석방되었으나, 나중에 진심으로 그것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보속을 하였다. 그의 부모가 결혼을 시키려 하였으나 아내와 아들이 아마 천주교 본분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끈질기게 거절하고, 끊임없는 재촉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에 가서 살았다.
착한 일을 하는데 지극히 열성적이고 집안 걱정이 도무지 없으므로, 그는 남을 가르치는 데 쉽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애덕(愛德)의 일에 온전히 자기를 바쳤고, 그의 말은 교우와 외교인 동포들 가운데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다.
대박해 때에 체포되자, 그는 옥에 들어가는 때부터, 방금 배교를 한 고광성(高光晟)에게 뉘우치라고 권고함으로써 자기의 열성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성공을 거두어 고광성 에게 순교의 영광을 얻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도 형벌의 시련을 받아 배교한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관원이 고문을 중지시키고 석방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풀려나면 곧 전과 꼭 마찬가지로 다시 자기 종교를 신봉하겠다고 외쳤다. 배교를 했다가 곧 이어 취소를 하는 같은 장면이 여러번 되풀이된 모양인데, 그것이 꽤 놀라울 것은 없으니, (이국승) 베드로는 자기 기질의 모든 장점과 더불어 모든 결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질이 급하고 열렬하며 열성이 가득한가 하면, 변하기 쉽고 끈기가 없어 여러 경우에 유감스러운 경솔을 보여 주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어 당신 종의 일체의 교만과, 자신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완전히 없애주시기 위하여 여러차례에 걸친 잘못을 저지르게 허락하신 뒤에, 꾸준히 신앙을 굳세게 증거하고 사형선고를 얻어내는 데 필요한 힘을 그에게 주셨다. 그는 참수당하기 위하여 공주(公州)로 하송(下送) 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를 따라오는 구경꾼들에게 여러 번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
(이국승) 베드로는 526일이나27일에 참수 당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30세였으며, 그의 시체는 조카들이 공주(公州)에 매장하였다.
 
 
이존창이 권철신의 제자임은 강학 당시부터!!!
 
1.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약전 149/ 이존창이 양근의 권씨 집안을 찾아감.
 

첨부파일1 : 201711519494921113.hwp
Writer : 김학렬 신부   Date. 2017-11-05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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